김명배시인의 신서정시
[스크랩] 덩굴 /김명배
신서정시
2018. 2. 4. 16:39
덩굴 /김명배
가끔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려 보지만 그때마다 그건 내 기침소리다. 며칠 전 화장실 거울 속에서 어머니 입술의 그 작은 반점을 발견하고 또 한번 깜짝 놀랐다. 내 입술에 언제 그 반점이 돋아났을까. 딸꾹질이 난다.
처음 가는 길이 너무 낯익어 어리둥절한 적이 있다. 대학생 같기도 하고 건달 같기도 한 내가 흑장미빛 가죽가방을 들고 여러 번 그 길을 다닌 것 같고 여기 어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숨겨 둔 것이 있는 것 같아 멈추어 선 적이 있다. 거기 우물 속에 까맣게 녹슬고 있는 아버지가 계시고, 그 옆 어딘가에 형 같기도 하고 아우 같기도 한 내가 있고. 딸꾹질이 난다.
여기가 다 어딘가. 우리가 다 누군가. 또 다시 언젠가 본 듯한 풍경 속에 손을 밀어 넣고 확 잡아당기면, 줄줄이 딸려 나올 것 같은 많은 나를 예감한다. 딸꾹질이 난다.
아버지의 자리
아버지가 기침을 하시는가. 촛불의 그림자가 흠칫 놀란다. 때가 되면, 내가 있던 자리에 숟가락이라도 하나 남아 있을까. 책 한 권과 기침소리가 있는 아버지의 자리, 통로는 없지만 나는 때때로 그 자리로 해서 멀리 아주 멀리 아버지께 아니 간 듯 다녀오고 아버지 또한 아니 오신 듯 다녀가신다. 책장(冊張)을 보면 안다. 넘겨진 책장을 보면 안다.
출처 : 시인나라
글쓴이 : 난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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