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배시인의 신서정시

[스크랩] 귀뚜라미 소리

신서정시 2018. 2. 4. 21:43

 

귀뚜라미 소리 /김명배

                   - 허튼소리

 

세상 소리 다 귀막고 사는 아내가 솜봉으로 귀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했습니다. 2․30년 전부터 나는 귓속에 귀뚜라미 몇 마리 키우고 있기 때문에 어둠 속에 숨어 우는 귀뚜라미 소리는 어쩌다 감상에 젖을 때나 듣는 작은 악기소리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아내 말이 맞습니다. 요 며칠 귀뚜라미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습니다. 지하실이며 바깥 변소 그리고 귀뚜라미 번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어쩌나, 이 사건. 삼국시대 장인의 현악기 같은 귀뚜라미의 시신들이 단정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 고전의 쓸쓸함. 아내가 시장바구니에 담아가지고 온 튜브형 강력 바퀴벌레 살충제를 설치하면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효능 효과에 바퀴벌레 및 바퀴벌레 알의 구제라는 문구만 믿고 표시된 것 그것만 구제되는 줄 알았다니, 그 단순 무식 때문에 내가 집안 귀뚜라미를 다 살생하고 말았습니다. 흐르는 물에 눈을 씻고 돋보기를 써도 나는 아직 문구 이외의 다른 말뜻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종이 뒤를 보 는 건 어림도 없습니다. 올 가을엔 아내와 함께 솜봉으로 귀 청소나 하면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영 안 되면, 내가 어둠이 되어서 삼국시대 깽깽이 소리로 울든지 그것도 안 되면 귓속에 사는 귀뚜라미 소리나 들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도 내 귓속에 사는 귀뚜라미를 꺼내어 번식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년 봄엔 귀뚜라미 무덤 곁에 국화 한 그루 심겠습니다. 그 꽃이 귀뚜라미 소리로 울어 나를 용서해 줄지 모릅니다. 미안합니다. 그때엔 아무도 불을 켜지 말아 주십시오.

출처 : 시인나라
글쓴이 : 난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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