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배詩 해설 및 평론

[스크랩] [문학저널] 월평 0812

신서정시 2018. 5. 16. 00:03

(문학저널)시 월평 0812

 

소멸 의식과 ‘낭만적’ 환상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우리가 ‘낭만적’이라고 하면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것으로 흔히들 말한다. 일반적으로 낭만이라고 하면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거나 이상적, 낙천적인 상태를 말하는데 ‘낭만적’이라고 관형사가 되면 완전한 환상을 일컫게 되어 현대시에서는 낯설게 하기와 비슷한 전감을 발현하게 된다.

현대시사에는 낭만주의(romanticism)가 한때 풍미(風靡)한 적이 있었다. 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두에 걸쳐서 유럽을 휩쓴 예술적인 태도였다. 이는 초자연적인 것과 중세적인 것 또는 이국적인 취향을 좋아했고 감정과 공상을 존중하였으며 대담한 상상력의 구사에 의해서 문학의 시야를 확대해 나깠다.

영국에서는 워즈워드, 바이런, 키이츠 등의 시인이 등장했고 프랑스에서는 뮈세, 비니 그리고 독일에서는 노발리스 등이 활약했다. 이들은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으나 정세 변화의 관계로 흐르는 경향의 단점도 있었다. 이로 인해 19세기 프랑스 상징파가 생겨났고 영국에서는 20세기 모더니즘을 탄생시키게 된다.

우리 현대시에서도 <백조>동인을 중심으로 하여 홍사용, 이상화, 박종화 등이 낭만시를 썼으나 이것은 유럽의 낭만주의와는 본질적으로 그 양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난 호『문학저널』에서 일별한 작품에서는 단연 김명배의 시 2편에 주목하게 된다.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며 깊이 있는 주제를 숙성시키고 있다. 김명배의 「낭만적 . 1」에서 스스로 ‘낭만적’이라는 어조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개똥이와 별똥이는 낭만적이다

그런데 그게 무어니

나는 지금도 엉덩이네 광채를 달고

어둠속을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때로는 꽁무니에 빛나는 긴 꼬리를 달고

세상 밖으로 추락하는 꿈을 꾼다

개똥이와 별똥이는 야행성이다

그런데 그게 무어니

어쩌다가 잊어버리고 마는 세상

눈을 감았다 뜨면 여기가 거기다

우리는 왜 어둠속으로 소멸하는 거니

안 보이는 것들은 모두 하늘이다

소멸하는 것들을 위해 통곡하지 말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없다면

잃는 것도 없다

개똥이와 별똥이는 낭만적이다

그런데 그게 무어니

 

김명배는 개똥벌레(반딧불이)와 별똥별(流星)의 동질적 개념에서 ‘엉덩이의 광채’와 ‘어둠속을 날아다니는 꿈’에 대한 대위적 언술로 ‘우리는 왜 어둠속으로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극적상황을 제시하면서 ‘소멸’ 이후의 공허와 무상무념의 주제를 극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이것은 생성과 소멸을 전제로 하는 우리 인간의 생몰(生沒)의 현실적 현상을 그는 ‘광채’를 달고 현실을 유영하다가 어느 날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 명징한 이미지로 현현되고 있지만, 그는 이를 ‘낭만적’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우물에 빠진 달을 건지려다가

두레박을 놓친 날 밤엔

어머니의 은가락지만한 하늘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누가 덥석 머리채를 잡고

끌어 올리셨더라

깨고 나면 언제나 달이

벌써 중천에 떠서 휘영청 밝으셨다

추락의 끝은 어디였을까

별 한 바가지 흩뿌려서 공양드리고

떠나고 싶은 밤

이 낭만, 누가 만든 길인가

문구멍으로도 환히 보이는 저 길을

이제는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보기 없기

어머니의 은가락지만한 하늘속으로

꿈꾸며 걸어가기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겠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어머니는 늘 나를 금 안에 두신다

 

그렇다.「낭만적 . 2」에서도 ‘추락하는 꿈을 꾸’는 시적 정황이 ‘날아다니는 꿈’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또한 ‘떠나고 싶은 밤’이나 ‘이제는 떠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어조도 ‘소멸’과의 동류의 이미지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똥이와 별똥이는 낭만적’인데 ‘그게 무어니’라고 의문을 제기했으나 ‘어머니의 은가락지만한 하늘 속’이 적시되므로 해서 화자 ‘어머니’에 대한 상념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 ‘추락의 끝’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이처럼 환상적, 이상적 혹은 낙천적 담대한 어조는 그가 인생 연륜이나 문학 연륜에서 존재와 상관된 다양한 사유의 변환으로 관조나 달관의 의미도 함축되어 있음을 리해하게 된다.

배문석의「한강 크루즈」에서도 이러한 상상력의 일단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무던히 보고 싶었던 게야

저리 조바심처럼 어둠 살라냈던

간밤을 수놓았던 그 흔적에서

아득한 은하를 불러

도시를 삼킨 찬란한 선상 이야기

 

강이 맨살로 그 품을 넓히며

별들 불러들인 가장자리

물굽이마다 껴안은 발길

강바닥에 드리운 까닭에서

잊혀진 사람들 깊이를 잰다

 

비가 흘러가서 바다인 이유로

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유유히 떠가는 크루즈배는 안다

그 몸 가득 채워진 설레임에서

눈빛마다 별이 된다는 전설을

 

무덤가에 핀 가시엉겅퀴꽃이

별 하나씩 꽃잎에 내려 밤을 물러내 듯

가시처럼 오가는 명멸 그 시야에

깊어진 계절만큼 사랑했노라고

오늘, 강물에 편지를 쓴다

 

배문석도 ‘별’과 ‘어둠’에 관한 이미지가 ‘강물’과 조화를 이룬다. 결국 그는 ‘명멸’과의 환상에서 낭만적인 ‘전설’을 탐색하고 있다. 김명배의 ‘별 한 바가지 뿌려서 공양드리고 / 떠나고 싶은 밤’에서나 배문석의 ‘별 하나씩 꽃잎에 내려 밤을 물러내’는 상황들이 소멸(혹은 명멸)과 소통되는 낭만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와

날보러

도동항에 모여든 사람들

 

뼈도 못추리고 죽는구나

 

한연순의「오징어」는 단순하면서도 ‘뼈도 못추리고 죽는’ 소멸의 의식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이는 ‘오징어’라는 대상사물의 형상이나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고 생멸을 이분법적 논리로 분할하면서 ‘도동항에 모여든 사람들’과 ‘오징어’의 대칭점을 함축성 있게 적시하고 있다.

 

그를 만난 후

난 자꾸만 그에게로 물들어 가고 있다

모난 성격

세상의 온갖 진흙은 그대로 묻었는데

내 속은 왜 자꾸만 그의 향기로 물드는지

내가 깊은 곳에서

그의 작은 뿌리로 매달려 있을 땐

잎사귀는 나의 그늘이 되고

줄기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거늘

이제 세상 가운데 홀로 선 나

세월은 발 없는 덩굴로 나를 휘감아

그의 끈으로 꽁꽁 묶었는데

너도밤나무처럼 낯선 나를 기억하며

아랫목으로 데워진

그의 품속을 기다린다

썩지 않으려고 내 속의 물기를 말리면서

 

박경희의「호박 고구마」에서는 시적 화자 ‘그’와 ‘내(혹은 나)’가 교감하고 있다. 이 교감이 결국 ‘썩지 않으려고 내 속의 물기를 말리’는 예비 소멸을 표징하고 있다. 이러한 의인화의 시법은 시적인 묘미를 높이는데 그 몫을 다한다. 사물을 사물 자체로 언술하는 것보다는 ‘호박 고구마=나’라는 의인법은 시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문장에서도 큰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제3인칭 대명사인 ‘그’에 대한 암시가 없다. 시의 흐름이나 내용으로 보아서 ‘호박 고구마(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나 주위의 어떤 형체로 유추할 수 있겠으나 ‘그’와 ‘나’의 대칭적 구도에서 시법을 전개했다면 더욱 공감대를 확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찌 되었거나 이 낭만적‘이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다양하면서도 새로운 정감을 유발케 하는 촉매제가 된다. 일찍이 본질적으로 낭만주의 정신을 귀하게 여긴 하이네는 낭만적인 감정이 자극될 만한 여러 가지 형상을 조형적으로 구성하는 문학적 형상이 명료한 윤곽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낭만적’인 언술이 곧 낭만주의는 아니라는 것이지만 쉬클로프스키가 주창한 ‘낯설게 하기’에 근접하는 이상과 환상이 혼합된 시법이라는 전제가 가능해 진다. 사물을 사물이미지로만, 아니면 관념을 관념이미지로만 표현되는 시적 구도보다는 ‘낭만적’ 구고가 더욱 시의 본령을 명징하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청송시원
글쓴이 : 김송배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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