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배詩 해설 및 평론

[스크랩] [월간문학] 월평 0811

신서정시 2018. 5. 16. 00:04

월간문학 시월평 0811

 

자성의 언어 혹은 인식의 미학

 

金 松 培

 

일찍이 괴테는 『잠언과 성찰』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보다도 오류를 인식하는 편이 훨씬 용이하다고 했다. 오류는 표면에 나타나 있으므로 쉽게 정리할 수 있지만, 진리는 깊은 곳에 숨겨져 있으므로 그것을 탐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언지이다.

우리 인간들이 한 생애를 통해서 성찰하는 과정에서 이미 표면화한 오류에 접근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런 오류들이 현실과 적응할 수 없는 갈등이 상존하게 된다. 이것은 생에 관한 진실의 탐구보다는 갈등의 화해를 구가하려는 인도주의적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인간의 진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물론 선험적인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중시하겠지만, 이는 단순한 심리적 변환에서 성취되는 것은 아닐터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치관의 정립은 보다 지적인 혜안과 형이상적인 정서의 중심축에서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고도의 정신세계와 합일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인식(erkenntnis)이란 이러한 지각과 경험에 바탕해 있으면서도 이 양자를 초월하는 사고방식이다. 한 가지의 감각적 파악으로 보편적인 의미와 일치시키는 것과 또 하나는 보다 더 보편적 성격을 띤 특징들을 통해 의미를 규정하는 특성을 가지게 된다.

현대 시인들은 이와 같은 인식의 근저에서 현현하는 자성의 언어를 탐색하거나 인식의 범주를 확대하는 경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철학쪽에서 보면 플라톤의 직관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그 속에 / 잠겼던 것이 / 긴 세월을 이고 일어섰다 / 그 속엔 / 숨었던 시간이 / 수줍게 일어섰다 // 태초(太初)에 있었던 것처럼 / 전혀 없었던 것 같은 / 그가 / 긴 시공(時空) 세월이란 / 명찰을 달고 / 그 빛 밝히려 일어섰다 // 내 속에 있던 그림자 / 그 속에 있던 빛 / 또다른 그와 내가 / 아련한 그와 내가 / 아련한 시간 건너 서 있었다 // 그는 그의 / 나는 나의 / 아득한 세월을 / 조용히 실눈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 바람도 없는 날.

--秋恩姬의 「그-그리움에게」전문

 

우선 ‘그 속’이라는 미지의 공간에서 유추하는 시간성과의 대위적 개념의 조화를 이해하게 된다. ‘그 속에 / 잠겼’거나 ‘숨었던’ ‘긴 세월’과 ‘시간’이나 ‘태초’와 ‘시공’에서 발현하는 ‘그 빛’과의 연결은 ‘그는 그의 / 나는 나’에 대한 고차원적 주제인 ‘그리움’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인식론에서 말하는 인식하는 자(인식주관)와 인식대상(객관) 그리고 인식내용의 3원적 상관성을 절묘하게 합일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내 속에 있던 그림자’와 ‘그 속에 있던 빛’으로 승화함으로써 시적효용을 극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의(인생의) 재발견에서 수용하는 연민의 양상이며 성찰의 언어라는 점을 간과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한 개인의 ‘그리움’이라고 단정하더라도 인식 미학의 측면에서 사유한다면 시인의 지적혜안으로 직관하거나 유추된 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마루 밑에 숨어 사는 어둠과 침묵은 곧잘 헌 고무신짝 속에 들어가 밀담을 나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안마당과 뒤꼍을 오가며 산책을 즐긴다. 저것들도 나만큼이나 늙었다. 왜 집을 떠나지 못할까. 어디 그거나 달려 있는지 거기 한 번 만져 보시게.

-- 金明培의「은거」전문

 

너는 푸른 여백이다 / 무슨 간절함이 있어 텅 비어 있는가 // 세상에는 아직도 / 며칠째 안개비 내리고 // 바람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황급히 가는가 / 말해다오 //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 끝내 / 저 섬의 몸에 닿지 못한다.

-- 김성춘의「섬-아, 구차한 나날이다. 오늘이여 . 장석남」전문

 

김명배의 ‘은거’는 ‘어둠과 침묵’의 ‘밀담’으로 시작한다. 과히 형이상적인 인식이다. 이 ‘은거’라는 의미에서 이미 우리들은 주제의 향방을 예측할 수 있겠으나 그는 ‘나만큼 늙었었다’는 단정으로 ‘어둠과 침묵’ 그리고 ‘은거’의 내밀한 상보성을 적시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하고 재인식하는 여과장치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성춘은 ‘푸른 여백’과 ‘텅 비어 있’음을 ‘섬’이라는 어느 공간을 설정하여 거기에 ‘닿지 못’하는 갈등의 요소가 표출되고 있다. 이는 그가 ‘우리들’이라는 공감의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인식의 세계를 존재의 본질로 접근하려는 시적사유의 발현이다.

이처럼 자아를 재발견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갈등과의 화해요소를 짐작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단계가 시적이냐 산문적이냐 하는 것은 일상인의 사유와 시인의 지적사유와 판이하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시 창작상의 각별한 필연이기도 하지만, 시인들의 시 정신의 원천이 되는 인식의 상황(사물이든, 관념이든)이 근원적으로 감성(感性)과 오성(悟性), 이성(理性) 등의 심리적인 체계가 정립된 인식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순길이 ‘배는 뜨기 위해 / 제 속을 다 파낸다’는「준비」나 임기원이 ‘길 위에 서면 / 또 하나 건너야 할 강이 있다’는 「허공」, 김성수가 ‘산이 산을 낳아 / 호숫물에 휑구고 있다’는 「처신」, 고정애의 ‘이 새벽 어둠 속 남몰래 엎드려 / 부시로 부싯돌을 세차게 치고 있는 / 실루엣’이라는 「불덩어리 열매」그리고 권선옥이 ‘내일이면 내 몸은 또 / 어제처럼 무거워질 것이다 /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 세상의 것들은 모두 독이 스미어 있다’는「독(毒)은 무겁다」등의 작품에서 고차원적 자성의 언어와 인식의 미학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배두순의「달의 자식」에서는 요즘 성행하는 하나의 스토리를 전개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주제를 창출하려는 시법을 접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표현기법의 변화는 이제 실험단계를 지나 많은 시인들이 작품에 적응시키는 새로운 경향으로 안착하고 있다. 강준형의「나의 빈 무덤」과 곽현숙의「옥수수」그리고 김건일의「밭 만들기 . 1」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시는 현실 이상의 현실과 운명 이상의 운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아 성찰의 언어가 필요하며 존재를 인식하는 지적 상상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인들의 고뇌를 이해하게 된다.

 

*자료 : www.ksbpoet.com

출처 : 청송시원
글쓴이 : 김송배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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