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그리기 / 김명배
도화지 위에 4B연필과
모양이 닳아 없어진 지우개를 놓고
일어서다가 그만
지우개를 떨구어 버렸다.
발도 없는 것이 재빠르다.
굴러서 침대 밑으로 얼른 숨어 버린다.
저것도 다 사는 재주가 있구나.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는 까닭을 알겠다.
더 느린 과거에서 온 듯한
발이 많은 갑각류의 벌레들도
빨리 산을 내려가려면
발을 넣고 몸을 말아서 굴러버린다.
그래야만 단숨에 산을 내려갈 수 있다.
발이 없는 것이 발이 있는 것보다
빠르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지만,
사람은 사람의 속도로 살면 안될까.
도화지 위를 걸어가는 발을 그리자.
발을 생략하지 말라.
이유가 있다.
저 지우개는 발이 없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출처 : 시인나라
글쓴이 : 솔로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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