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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배문학상

대 상 : 김겨리 시인

 대 상 : 김겨리 시인◉

응모시집: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2019년)

경기도 안성 출생, 본명 김학중

홍익대학교 졸업

201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제8회 김만중문학상(2017년)

제16회 웅진문학상

시집: 분홍잠,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거주지: 충남 당진시

 

 

당선 소감 / 김겨리▣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하다. 코로나19로 삶의 기복도 심하다. 창가에 앉아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오후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귀를 활짝 열어도 자꾸 눈이 닫힌다. 습관적으로 무엇인가 끼적이던 백지가 여백도 없이 공란으로 빼곡하다. 문득 젖은 도로 위를 한 입 한 입 삼키듯 몰려오는 땅거미가 짚신벌레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물이 생물로 동물이 식물로 치환되는 노을 질 무렵,  

 

   언젠가부터 모두 규격화된 삶을 산다고 느껴졌다. 사회적 거리며 감염이며 집합금지며 4인 이하며 백신이며᠁, 생소했던 단어들을 하루에도 수없이 듣다보니 이젠 모두의 삶의 기준이 된 듯하다. 노트북을 펴고 습관처럼 사유의 저 너머를 한 줄 한 줄 채워나가다가, 내가 밑줄이 되어 나를 채우는 그 무엇에 잠시 숙연해보는 일. 빈칸으로부터 시작된 습작은 빈칸을 그대로 두는 퇴고로 점철되고.

 

   의제헌.김명배 문학상 응모에 부쳐, 평생 천안의 향토문학과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신 큰 시인의 사유에 내가 감히 접근할 수 있을까, 숙고해보는 일. 그 분의 업적에 일말의 밑줄이라도 될 수 있다면 무한한 영광이기에 문학상의 이름 앞에 겸허해지고자 한다.

 

   얕은 사유에 따뜻한 눈길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의제헌᠊김명배 문학상 수상자로서 문학상의 명예에 부응하도록 좋은 작품 창작에 부단히 정진하겠습니다.

 

 

당선작

 

안개라는 개3

 

나무와 집과 소리와 여명까지 삼키는 잡식성 맹견

온몸이 어금니와 식도로 된 독종이다

컹컹 짖을 때 날리는 축축한 비말은 번식세포,

안개는 바람의 병법으로 빠르게 영역을 점령한다

부드러운 이빨로 무엇이든 질겅질경 씹다 통째로 삼키는 안개

한번 물면 놓지 않는 흡혈성 식도를 가진 안개는

아침이 주식이다

안개의 먹이사슬들은 눈이 퇴화되는 대신에 청력이 예민하다

나무도 돌도 물도 풀잎도 모두 청력이 발달된 종들

상처의 바탕, 울음의 면적, 고통의 질감처럼

안개를 개복하면 온갖 씨앗들이 발아한다

안개의 부리부리한 눈을 본 적이 있는가

마주치면 송두리째 빨려들 듯한 무자비한 혼곤으로

꼼짝없이 당하고야 마는, 촉촉이 젖는 공포에 대해

상온을 밑도는 체온이라 냉혈인 듯하지만

그의 소화기관을 거쳐 한 폭의 배설물이 돼 본 자들은 안다

뭉클한 식도, 환한 위장, 부드러운 괄약근을 지나야

아침에 당도할 수 있다는 것을

부력을 공고히 다지는 일출의 양수이므로,

통증의 마지막 획으로 난산한 나뭇가지가

아침의 뒷면에 꾹꾹 눌러쓴 필흔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안개는,

세상의 모든 높이와 길이와 넓이와 속도가 같은 반려견

짖다, 라는 동사가 아니라 젖다, 라는 형용사이다

 

 

ㄹ의 경로바람

 

빠진 수레바퀴를 끌며 노을을 횡단하는

한 노인의 그림자에 노을이 듬뿍 묻어 있다

몸이 붓이 되어 하루를 필사하는 필체가 선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긴 획 ㄹ, 노을의 끄나풀

속으로 되뇌어도 숨이 막히는 문장이다

리어카에 폐지를 싣고 귀가하는 삐뚤빼뚤한 흘림체가

우화등선의 궤적 같다

뿌리가 다 드러나도 읽을 수 없는 모든 어미의 내력은

무독이 치사량인 울음의 바닥

굳은살을 지나 골다공을 지나 눈물의 반감기를 지나야

지독한 무색무취에 닿을 수 있음을,

하루 칠 분씩 늦어지는 시계가 걸린 벽이

계절마다 칠 도씩 기울어지는 각도에 수렴되듯

ㄱ에서 ㄴ을 거쳐 ㄷ을 지나 ㄹ의 자세로

중력도 부피도 없는 별자리 하나가 방 안에 누워 있다

물병자리 옆에 ㄹ자리로 빛나는 샛별 하나

서서히 드러나는 유성의 실체,

머리맡 물이 다 증발한 자리끼 물그릇에는

푸른 하늘 한 모금, 새의 날갯짓, 바람 두 움큼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

 

 

꽃의 자세

 

철개지 듬성듬성 핀 꽃들의 꽃대가 다 자다

수직에 매달려 수평의 꽃을 피우기 위해

의 각도를 유지하며 절벽을 움켜쥔 악력.

직립에서 횡립으로 진화될 수밖에 없기까지

노란꽃은 간절함 붉은꽃은 절규의 은유

꽃은 피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듯

꽃말이 신중한 꽃들은 빛깔이 꼿꼿하다

추락을 견디기 위해 관절이 자로 휘어질 때

뿌리는 자의 갈고리가 되어

얼마나 오래 절벽에 매달려 있어야 했을까

목덜미에 부리를 묻고 외발로 서서 꿈을 꾸는 새들처럼

낭떠러지에 뿌리내린 꽃들의 악착,

부서진 시멘트 틈 사이로 드러난 철근과

기둥에서 불거져 나온 구부러진 못과

골다공증을 않는 어머니 무릎도 의 자세이다

농도와 체위는 다르지만

통증의 접미사가 된 무색무취로

멀리 도약하기 위한 도움닫기 자세이기도 한 꽃의 ,

절벽에 핀 꽃들의 수화를 읽을 때는

빛깔은 자음으로 꽃대는 모음으로 읽어야 한다

 

 

반지하 집

 

풀잎에 오카리나 소리 몇 방울 앉아 있다

달빛만으로도 저렇듯 고운 소리를 빚을 수 있다니

소리가 소리 없이 증발하는 동안

새들이 공중을 물어다 투명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창틈에 파랑을 발라 웃풍을 막으면

노랑이 뼛속까지 저며 오는 집

창 위에 놓인 화분에 심은 적 없이 꽃은 피어

창문 열고 더빙하듯 꽃빛을 쬐는 맨발

그걸 희망의 수사법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새의, 바람의, 벌레의, 적막의, 햇살의 집

차곡차곡 쌓인 그늘이 재산을 불리는 일 같아

밑동마다 수북이 쌓여 있는 이슬 껍질들

바람의 발자국이 있다면 아마 저럴 것인데.

그늘로 군불을 때서 습기가 무성한 벽화들이

단칸방의 머리맡까지 푸른 화염으로 번져서

살 섞자마자 태어난 몽고점들 걷잡을 수 없다

해는 잘 들지 않지만 새소리만큼은 일품인

창공이 지붕이고 우듬지가 피뢰침인 집에

매일 푸른 번개가 쳐서 밑줄만 번쩍번쩍

수만 볼트 전압에 감전된 이끼의 집이

푸르게 푸르게 활활 불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