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상 : 사윤수 시인◉
응모시집: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2019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1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파온”,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
거주지: 대구광역시
▣당선 소감 / 사윤수▣
흰구름이 하늘 가득 퍼포먼스를 펼치는 늦여름, 모처럼 경주에 와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소식이 왔습니다. 경주가 고향인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시인이 되고 별빛 같은 시를 쓰신 김명배 시인을 추모하는 문학상이어서, 오늘 내가 경주에 온 뜻이 무슨 우연처럼 그 분들의 부름을 따라 이곳에서 발자취를 느끼는 듯 좋았습니다.
자신의 뒷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듯이 나의 시도 누가 비춰주어야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짐작하겠는데, 한 시인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은 그래서 거울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명배 시인의 작품 중에 특히 「휴식2」의 “시간은/ 시계를 빠져나와 가출해 버렸고.../ 배가 고파서야 돌아온/ 시간을/ 시계 속에 밀어 넣었다/ 수기(手旗)를 들고 시계는/ 시간을 다시 시작했다.”라는 이 구절만으로도 제겐 깊고 큰 귀감이 됩니다.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기에 일찍이 수없이 들었던 경기민요 ‘천안 삼거리’는 또 얼마나 흥겨운가요. 심사는 치열하고 당선은 행운이 따르는 법인데 저를 끝내 흥겨운 쪽으로 밀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다정한 인사를 올립니다. 이번 기회에 김명배 시인의 고향인 천안에 가서 저의 ‘시 고픔’을 더욱 넉넉히 채우고 싶습니다.
▣당선작▣
청보리밭 외 2편
이 짐승은 온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
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
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단위로 헤아린다
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짖는 법이 없고
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
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 말로 자라고
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내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
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물이 들었다
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 초록 비단 춤
이 짐승은 일생을 돌아눕지 않는다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건
꼿꼿하고도 무성한 황금빛 수염이다
바람은 참빗을 들고 짐승의 수염을 곱게 빗어준다
짐승은 수염을 일제히 세우고
바람의 발바닥을 간질이며 논다
바람의 발바닥엔 그 짐승이 새긴 초록 문신이
아직 푸르게 남아 있다
수평선이라는 직업
수평선도 나름 바쁜 직업이다
수평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들을 담당한다
날마다 해를 길어 올리고
달마다 달을 빚어 띄우는 일
그거 아무나 못한다
수평선이 없다면 해는 어디로 떠오르며
달은 어느 배[腹]를 빌려 둥글어지겠나
수평선이 아무 일 안 하는 거 같아도
그 자리 고요히 지키고 있는 것이 수평선의 주소다
내게도 그런 수평선 하나 있다면
본적(本籍)은 필요 없으리
너의 타는 마음을 수평선에 널어 말릴 때
수평선은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에게 기여한다
고깃배들 불빛이 보석 브로치처럼 밤바다에 맺혔다
이 배 저 배 배다른 새끼들까지 젖을 물리며
수평선은 순한 물의 짐승으로 누워 있다
만선이 될 때까지 새벽이 올 때까지
낯선 섬마을에서
나도 가끔 저 수평선의 무릎을 베고
잠들곤 한다
북풍
아무도 보지 못했네, 북풍의 검은 입을, 어디로 삼켰을까 눈 조차 없는 바람의 뱃속에서 사막이 뒤집히는 소리 짐승들 쫓기며 달리는 소리, 어제는 코끼리 떼를 잡아먹고 오늘은 산짐승을 꺾어 먹고, 저 잡식성 바람의 이빨에 끼여 울부짖는 짐승들, 세상의 배고픈 것들은 입이 없고 배만 있어,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북풍의 뱃가죽이 말라붙었네, 잠든 간판을 부숴 먹고 현수막까지 찢어먹고 그것들 내장이 덜렁덜렁 펄럭펄럭 홀러나와 만장 나부끼는 소리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내 머리 끄덩이를 잡고 끌어내려나 긴긴 밤 창문을 때리며 뒤흔드는, 작은 섬에도 북쪽이 있네, 북쪽은 크고 북쪽은 대문이 없고 아무도 없고, 무법천지네 촛불이 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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